라이프로그


나에게 커다란 상처를 안겨준 연애 트라우마... 16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가장 듣기 '뭐한' 소재는 바로 '연예' 이야기입니다. 주변의 어떤 지인들은 만날 때마다 '회사 어느 부서에 신입사원이 들어왔는데 괜찮다더라' '누구누구랑 누구는 서로 사귄다' '소개팅 했는데 얘는 별로다/쟤는 괜찮다''내가 예전에 사귄 누구누구는 성격이 이렇고 뭐가 어떻고'...이런 이야기를 줄창 해대는 경우가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 전혀 공감도 가지 않는데다가 '연애' 라는 것이 저 같은 사람과는 전혀 동떨어진 세계의 것이라고 느껴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죠.

 하지만 제가 연애라는 소재에 대한 불편함을 가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대학교 1학년 때의 어느 '트라우마' 때문이었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전공과목 공부를 하기 위해 도서관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도서관 열람실 모퉁이는 인적이 드물기 때문에 조그만 목소리에도 금방 주변이 울려퍼질 것 같은 분위기였죠. 바로 그 모퉁이를 지나가던 중 어느 여학생 두 명이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 여학생들에게 별 관심은 없었으나 모퉁이를 지나기 위해 점점 그들에게 다가가게 되면서 조금씩 대화내용이 들리기 시작했죠.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아마도 어떤 스타일의 남자를 선호하느냐는 매우 흔한 가십거리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열람실 모퉁이를 통과하면서 자연스레 그녀들이 있는 테이블 주변을 스쳐 지나가게 되었고, 방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며 낄낄거리던 그녀들은 힐끔 제 얼굴을 아래위로 훓어 보면서 저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죠. 

 이윽고 제가 그녀들을 등지고 모퉁이를 완전히 지나가는 순간 조그마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야, 방금 지나간(남자 같은)스타일은 어때? ㅋㅋㅋㅋㅋㅋㅋㅋ'


 주변에 아무도 없었으니 방금 지나간 남자는 당연히 '저' 였고...뭐...사실 그 순간에는 알면서도 '그냥 그런 가보다' 했습니다. 저는 공대 출신이기에 학교생활 도중 볼 수 있는 여학생의 숫자는 지극히 한정적입니다만, 그런 것 까지 신경 쓸 이유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이윽고 누군가가 버럭! 정색을 내는 듯한 목소리로 언성을 높이는 것을 듣게 되었거든요. 


'야! 미쳤어? 어떻게 저런 애랑...차라리 나보고...'(앙칼진 목소리로)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매우 조용한 도서관이기에 그 여성분의 앙칼진 목소리를 정확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궁금해서 힐끗 뒤를 돌아 보았습니다. 당연하게도 그 앙칼진 목소리의 주인공은 방금 마주쳤던 두 여학생 중 한 명인 듯 했습니다. 당시에는 민망하고 창피해서 재빨리 발걸음 속도를 높혀 그 자리를 빠져나갔지만, 그날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내내 그 여학생들이 제게 보낸 눈빛이나 대화 내용이 여간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곰곰히 생각해 보니 솔직히...생각하면 할 수록 제 자신이 그토록 비참하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차라리 나보고...' 다음에는 무슨 말이 이어졌을까요? 당시에는 황급히 자리를 빠져나와 못 들은 척 했지만 아마도 '차라리 나보고 죽으라고 해' 라는 말이었을 겁니다. 문맥상...

 '그저 그래' '별로야' '내 스타일 아냐' 라는 말이었으면 충분히 이해하고 넘어갔을 테지만, 솔직히 말해서 저같이 '못생긴 남자' 한 번 봤다고 그렇게까지 정색을 내면서까지 부정하는 태도를 보니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당시에는 제 신세가 정말 비참하게 느껴졌고, 화가 나기까지 했습니다. 별 것 아닌 대화내용에 커다란 충격과 외상을 입었던 것이죠. 

 여하튼 그 일이 있던 이후로 저는 극심한 두려움과 창피함에 사로잡혀 여성(여학생)들을 조금씩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행운이게도 전공이 '기계공학' 이라 학교생활 중 여성을 접촉할 기회는 거의 드물었지만 타 학과생과의 팀 과제, 장학재단 행사와 같이 여학생들과 섞일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는 최대한 자리를 피해가기 시작했고, 그들과 눈조차 마주치지도 않으려 했습니다. 왠지 저랑 눈이 마주친 여성들은 속으로 제 욕이나 험담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여성의 연락처는 절대 등록해 두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변의 동성친구들을 통해서만 간접 연락을 하게끔 했지요.

 이런 말도 안되고 별 것도 아닌 경험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은 제가 문제인 것일까요, 아니면 제게 그런 반응을 보였던 그 여학생들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요? 솔직히 말해서 이처럼 병맛같고 찌질한 글은 없을 것 같아 보입니다. 어차피 세상 여자들은 제가 뭘하든 본인을 '이성' 으로 바라볼 확률이 전혀 없거든요. 쉽게 말해서 제가 뭘 하든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얘기...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죠.지금 제 나이가 30살 다 되어가는데, 만약 지금 이 시기에 처음으로 그런 말을 듣게 되었다면 과연 그때 만큼의 외상을 받았을까요? 주변 사람들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뭐 어쩌라고, 지네들은 얼마나 잘났는데?' 라며 당당하게 털어버렸을 수도 있을 테지만 당시의 저는 20살이었습니다. 남중-남고를 거쳐오고, 입시를 앞둔 청소년에게 '이성교제' 나 '연애' 라는 것이 죄악시 되던 그 시기를 벗어나 대학에 진학하는 순간, 그제서야 자유로운 연애시장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게 된 '신규 진입자' 의 입장이었거든요.

 그래서 아무것도 모를 때, 한편으로는 잔뜩 환상에 부풀어 있었을 때, 더군다나 나 자신이 '신품' 으로서 처음으로 상대 이성에게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시기에 그 여학생들이 제게 던진 비수같은 말은 그야말로 사형선고나 다름 없었던 것이었죠.

 이래서 '트라우마' 라는 것은 정말 무서운 것 같습니다. 마주하는 것 만으로도 창피스럽고, 두렵고, 불안하기 때문이죠.    

 written by 쓰레기 청소부


덧글

  • ㅉ; 2011/09/26 23:33 # 삭제 답글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생면부지의 사람에 대해 그 사람이 들을 수 있을만큼 크게 부정적인 논평을 한 그 여자들은 '문제'지만
    그것 한 방에 그렇게 큰 상처를 입으신 쓰레기청소부님은 뭐가 '문제'겠어요.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 쓰레기청소부 2011/09/27 20:24 #

    엥...무슨 말씀이신지...여하튼 감사합니다.
  • DUNE9 2011/09/26 23:45 # 답글

    '기계공학'쪽이 유독 심하죠. 동감 한표던지고 갑니다만..
    트라우마따위는 벗어버릴때가 된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할수 있으신것 보면.
  • 쓰레기청소부 2011/09/27 20:25 #

    아무래도 그렇겠죠. 아마 그런 기억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블로그에 이런 글 올릴 용기나 결심조차 서지 않았을 겁니다.
  • 2011/09/26 23:5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쓰레기청소부 2011/09/27 20:27 #

    자신의 경험을 빌어 이토록 장문의 글로 조언을 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ㅠㅜ 저도 자신을 꾸미고는 싶지만 매일매일 아침 화장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볼 때면 화가 나고도 우울해지거든요. 여하튼 피하는 방법은 좋은 것이 아닌 것 같긴 합니다.
  • 2011/09/27 09:4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쓰레기청소부 2011/09/27 20:28 #

    뭐...막말은 아니죠...저도 그 이후로 누구 외모나 모습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고 있습니다.
  • 히시 2011/09/27 11:21 # 삭제 답글

    위에 글에 동감입니다. 그게 트라우마였나보다라고 얘기하게 되는거 자체가 그게 진짜 트라우마든 아니든 하나의 별게 아닌 사건으로
    치부되는데 도움이되는거 같습니다.
    꼭 연애라는 게 별게 아닌 게 되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대화에서 터부시되는 소재가 적을수록 세상은 즐거운거 아니겠습니까 ?^^
    여자사람이랑 자주 놀고 얘기하는걸 추천드립니다
  • 쓰레기청소부 2011/09/27 20:29 #

    그 이후로 여자사람이 전혀 없는 직장에 와버렸군요. 제 운명은 원래 이렇게 될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지금까지의 제모습은 그리 올바른 것도 아니었겠죠...
  • 2011/09/27 11:3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쓰레기청소부 2011/09/27 20:30 #

    아하...그렇군요. 그 말이사실이었다면 저는 처음부터 무한한 과대망상에 빠진 것이었내요 ㅠㅜ
  • 찌랭이J 2011/09/27 13:48 # 답글

    헐 나쁘고 개념없는년들이네요ㅡ_ㅡ...
    극복하셧다니 다행입니다.
  • 쓰레기청소부 2011/09/27 20:30 #

    그 여성분들 자체는 밉거나 하지 않습니다. 주변 남자들 중에서도 여자 외모를 비하하는 사람이 있으니...피장파장일수도...
  • 찌랭이J 2011/09/27 20:50 #

    헉 대인배시네요;;ㅋㅋㅋ
  • 2011/09/27 21:5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통계 위젯 (화이트)

7961190
7963
8274648

이 이글루를 링크한 사람 (화이트)

366

애니메이션 편성표 - 애니시아